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그곳은 지식의 호수이다.
요즘은 다양한 도서관이 근거리에 있어서 편하게 이용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그중에 내가 자주 이용하는 것은 "바로대출"이란 방법이다.
지역에 따라 달리 운영되기도 하지만 "바로대출"은 시중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서점"을 활성화시키는 방안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에서 홈페이지에 최근 2년간 출판된 도서 중에서 도서관에 없는 책 중을 신청하면 해당 도서관과 협약된 동네 서점에서 책을 바로 대출 받는 시스템이다.
나의 경우 주로 책이 비싸서 선뜻 구매가 어려울 때, 책이 번역서인데 번역을 검증해보고자 할 때 "바로 대출"을 이용한다.
한달에 1인 2권의 책을 신청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그러한 바로대출로 빌려 보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의아할 것이다. 갑자기 '법철학'?
사실은 웃픈 에피소드가 자리 잡고 있다.
후설 철학을 따라가다가 분석철학에 닿아서 분석철학을 위한 책을 신청한다는 것이 같은 비슷한 빨간 표지의 이 책을 신청한 것이다.
'실수다'
실수라도 신청한 것이기에 읽어보기 시작했다.
탄핵이라는 이슈에서 나는 '법'의 체계가 너무나 중요함을 깨닫게 되면서 더 반가운 실수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사상과 이념이 사회적 체계에 반영한 것이 법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법은 발전 보완 또한 자기 검열을 통해 죽은 법들은 또한 폐지된다.
법이 만들어지는데는 공동체적인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입법기관이 그래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는 국민들의 개념과 이념, 사상에 의해 영향 받는다.
우리는 일제치하를 벗어나 근대적 정치 이념을 선택하면서 공산주의와 민주공화주의를 각각 선택하면서 분단이라는 상황을 맞게 된다. 외부에서 이식된 사상은 그러나 유교적 전통 철학체계를 가진 민족이기에 나름의 검증을 통해서 선택되어 졌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분단의 시기와 맞물린 이념적, 철학적 고뇌의 시간은 '전쟁'이라는 죽음의 공포 반응과 합쳐지게 된다. 더 풍성히 발달시킬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현명성이 집단의 감정적인 불안으로 물들게 되었다.
왜 뜬금없는 말인가 싶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이념", "사상"이라는 말에 불안의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닭았다는 것이다.
분단 이전부터도 그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있었다. 조선에서 부터 남인, 서인 등이 철학적인 이론을 배경으로 하여, 정치 철학을 구성하고 이를 행동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화를 통해 사상은, 이념은 죽음과 맞닿을 수 있음을 경함하였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우리 민족의 DNA에는 '사상', '이념'등의 단어에 불안의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정보들이 저장되어 버린 것 같다.
이런 불안의 요소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자기 표현에 있어서 '죽음의 불안'과 맞물리며,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 격렬하게 지지하거나 격렬하게 저항하게 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이는 이성적이지 않다. 이는 합리적이지도 않다. 이는 토론적이지도 한다. 하나를 취사 선택하고 나머지를 배격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집단적인 안정성을 형성하고 있다. 계엄이 선포되고 긴 시간을 아직 그 무질서의 시기를 정리하는데 소용하고 있는 것은 시스템적인 이성적 합의가 작용하도록 하려는 노력이다.
계엄이 공동체의 시스템적인 체계를 파괴하고 개인의 욕망을 집단에 강요하기 위해 일으킨 이유도 개인의 욕망을 집단 시스템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사상', '이념'에 불안 알레르기를 치유해야 한다. 그것들에는 죄가 없다. 오히려 그걸 통해 인간은 성숙해 간다.
죄는 그것을 살해의 이유로 들고, 그것을 개인 욕망의 실현의 도구로 삼아 피박과 폭력의 정당성 확보로 활용한 무리들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상'과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들을 하는 것을 생활화 해야 한다. 이것들은 내가 세상을 거시적으로 어떻게 바라보며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기둥을 만들고 그 기둥에 살을 붙여 나의 삶의 목표와 삶의 계획을 세우고 이루어내는 것이다.
만약 나처럼 이들 용어들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아픔을 묵상하면서 알레르기를 치유해야 한다. 독일의 주요 TV프로그램엔 철학 프로그램들이 많다. 오전 프로그램에도 토론 프로가 방영되고 있다.
우리의 주요 언론에서 그러한 토론이 있는가? 왜냐하면 그러한 철학적 사상적 프로그램들이 지난 과거 "사상 검열"이 된 역사를 통해 시스템에 굳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도 그 시대의 잘못된 철학적 태도를 그대로 기억속에 저장하고 나도 모르게 회피하게 되어 자극적, 소모적 프로그램에 멍하니 나를 버리는 것일 수 있다.
아픈 역사가 맞다. 그러나 아픔을 회피하기 보다 그 아픔을 직시하고 다른 선택을 통해 지금을 변화시켜 가야 할 것이다.
실수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콜럼버스의 실수가 아메리카를 세상에 소개했듯이 말이다.
나의 실수도 나에게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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