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숲

보수의 극우, 극을 향한 내달림.

faramita 2025. 1. 31. 16:46

얼마 전 서부지법 폭동 사태에 있어서, 우리 공동체를 위한 기본 대들보를 흔드는 상황에 모두 놀랐다.
두번째 놀란 것은 그 소요세력의 반수 이상이 20~30대라고 한다. 
또한 그 20~30대도 남자들로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신자라는 특징적인 특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우리 사회는 퀘스천 마크를 던진다. 
 
탄핵찬성 집회에서는 
키세스군단이 상징하는 10대~20대 청년 여성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유니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단오하게 대열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대비되는 남과 녀의 다른 지금의 행동을 우리는 또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얼마 전 EBS의 '위대한 수업'에서 조앤 윌리엄스의 강의가 떠올랐다



 
조앤 윌리엄스는 "초예측"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보수의 결집에 대해 "백인노동자계급white working class(wwc)"의 결집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경제적 경직된 사회 구조가 더 이상 그 이전 부모세대 만큼의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없는 지금 세대들이 결집하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직설적이고 투박하고 자기 중심적인 표현 방식이 동질적 느낌으로 트럼프에 대해 결집하였다.
반대로 엘리트 계층에 대한 저항감도 작용하는데 백인노동자들이 업무 환경에서 엘리트 계층이 고객으로써 무시하고 경시하는 태도에 대한 감정적 반감이 투사되며, 이러한 것에 더 부가시키는 요소가 엘리트 계층 자체가 그들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지원을 토대로 지금의 자기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자기가 이룬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확대해석함으로써 그러한 우월적 태도가 가지며, 기부 등의 행동자체도 그러한 우월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활동으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즉 이러한 엘리트계층에 대한 저항감이 또한 "백인노동자계급"의 결집의 힘이 된다고 조앤 윌리엄스는 설명했다.
 
그런 그녀가 우리나라 방송에 출연하면서 우리나라의 20대 극우의 결집을 또한 분석하였다. 
 
여기서 조앤 윌리엄스는 EBS 위대한수업 <저출생, 워킹맘, 극우 그리고 신자유주의> "1강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왜 보수로 기울었나"에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 동영상을 소개하는 글에는 ' 청년은 진보라는 전통적 세대론을 깬 한국의 20-30대 남성들. 그들은 왜 보수를 지지하는 것일까? 그들의 불안과 분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고 질문하였고 이에 대해 조앤 윌리엄스는 '상실감'과 '경쟁' 때문이라고 답한다. 
 
영상의 도입에는 한국의 저출산율 그래프 다음으로 성별에 따른 정치적 이념에 있어서 여성은 자유주의를 남성은 보수주의로 반대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 그래프이다. 한국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합니다. 젊은 남성은 젊은 여성보다 50% 더 보수적이라고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극우 포풀리즘을 이끄는 집단은 무너진 중산층이라고 한다. 과거 부유했던 중산층의 남자들은 충분히 혼자서 경제적으로 가족을 책임지며 '가장'이라는 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사라졌으며 중산층의 가장의 일자리는 저임금 국가로 넘어가고 낮은 인금의 일자리로 변화면서 임금도 낮고, 혜택도 없으며, 불안정해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대신 주거비는 올라가며 중간층의 블루칼라는 많은 노동을 했어야 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더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중산층은 이 최저도 무너질까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고 극우로 결집하게 되었다. 특히 남자들이 이러한 박탈감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중산층의 임금을 하락시킨 것은 이민자가 아니라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한다. 신자유주의란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고 민간의 자유로운 경쟁을 중시하는 경제 이론으로 분배보다 성장을 강조하는 사조이다. 그러면서 정규직의 중산층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후 부유층으로 대규모 소득 재분배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미국과 유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1997년 이후 한국 노동법이 바뀌면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고용이 쉬워지게 된다 .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정규직에 비해 매우 낮다. 또한 상위 1% 소득 점유율이 2020년 12%로 증가 하게 된다. 
 이런 변화속에 상실과 불안이 점점 20대 넘성들을 지배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경쟁이다. '과도한 경쟁'이다. 이럴 땐 물질적인 안녕에 덜 집착하는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체질적 변화가 요구된다. 한국은 지금까지 물질적인 안녕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앤 윌리엄스는 경쟁보다는 '과도한 경쟁' 즉 너무 많은 사람이 안정된 중산층 생활로 이끌 좋은 일자를 두고서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미국과 한국은 비슷한 이유로 분노하고 불안해 한다. 

과거의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 일자리와 집을 가졌던 시대에 자란 남성들은 아버지가 가졌던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내, 집, 차, 아이들과 함께 중산층 생활을 누리는 삶을 말이다. 
 
또한 미국과 유럽, 한국의 차이가 드러나는데 미국과 유럽의 남성들은 분노를 이민자 탓으로 돌린다면, 한국의 남성들은 젊은 여성들을 향한다는 것이다.

지금 젊은 남성들은 젊은 여성들과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에는 대부분 남성이 좋은 일자를 차지했었다. 지금은 그 경쟁에 여성들도 뛰어들고 있다.

'분노는 항상 아래로 흐른다'.

사람은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분노하곤 한다. 이는 권력자들에게 분노하는 것보다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부유층이나 일자리의 질을 떨어뜨려 이익을 취하는 대기업에게 향할 분노를 젊은 여성들을 탓하는 것이다. 20대 80% 남성이 한국에서 남성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사회심리학에서 남성성 위협The Masculinity threat이란 연구가 있다. 남성성이 위협받을 때 남성들이 더욱 과장된 형태의 남성성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실직한 남편과 위킹맘 가정에서는 가정 폭력의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영상에서는 롭윌러의 실험을 다루는데 실험 그룹을 나루고 한쪽 그룹에는 '여성성'에 가깝다고 말하고 다른 그룹에는 '남성성'이 강하다고 말한다. 남성성 위협을 경험한 남성그룹은 현재 진행되는 전쟁에 대한 지지 가능성이 더 높았고 동성애에 더 부정적이며 큰 차를 선호했다. 

이러한 남성성의 위협 중에 가장 큰 것은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만큼 큰 위협은 없다. 
 
처음의 그래프에서 보여던 차이를 본다면 한국 여성과 한국남성들이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

남성들은 전통에 따라 모든 것이 유지되기 기대하며 더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여성들은 평등을 향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뒤 부분에는 그럼 어떻게 해야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 부분은 좀 더 뒤에 다루고 지금은 여기까지의 내용을 통해 지금 극우의 20대 남성들의 폭력성과 편향적 사고를 이해해 보자.
 
나는 남성성이 위협받는 시대임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남녀 불평등의 시대에서 가졌던 지위를 내려 놓고 양성평등, 인간평등의 선상에서 답을 찾아내어야 한다. 
 
과거의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성공은 본인 자질의 성공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사회적 시스템의 현상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박탈감과 불안감을 경험하는 남성 연대가 새롭게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과도기적 지점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자. 
 
이번 서부지점 폭력 사태의 극우 기독청년 20대들의 경우 교회의 주요 직책, 장로, 전도사 등 교회의 핵심 주축은 장년층들이 맞고 있다. 청년들의 생각과 사고가 토론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 정신을 찾아 20대들은 사이비로 빠지거나 극우의 반그리스도 정신의 극우 정치인들에게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간격이 줄어든다는 것은, 기준선이 올라가 전체적으로 줄어든 느낌이든, 기준선에 가깝게 내가 내려가든 내가 빼앗겼다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미래는 무한 경쟁속에서 불안하고 불투명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의 20대 남성들은 집에서는 거의 경쟁 없이 자기를 성장해 왔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는 무한 경쟁을 해야 한다. 그 경쟁에서 뒤쳐질 때 느끼는 모멸감과 분노와 수치는 뭉쳐져 에너지가 되어 행동화의 에너지원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며 수단화하는 나이깨나 먹은 늙은 노인들이 그들의 노쇠한 근력을 대신하도록 뱀처럼 꼬득인다. "모두 여자때문이며, 모두 저 진보의 자유주의 때문이며, 다양성이라는 허무맹랑한 문란한 사람들 탓이라고, 그러니 나가서 싸우는 전사가 되라"고 꼬득인다. 
 
서부지법사태가 벌어지고 한 보수는 그들을 "성도를 따르는 십자군"으로 칭하였다. 토가 나오는 뱀의 혀다. 남성성을 상실한 노인의 얼굴을 숨기고 20대 청년들 뒤에서 쭈구러든 손으로 독사과를 권하는 마녀와 같다. 성경의 뱀과 같다. 
 
지난 대선 이준석은 남녀의 갈라치기로 새로운 정권을 창출했다.
20대의 남성들은 지금의 정권이 자신들을 치유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통령은 자신을 위해 보수가 아니라 과거의 망령인 '게엄'을 꺼내들었고 그럼에도 일부 20대 남성들은 아직도 뱀의 속삭임을 에덴이라 여기며 쫓아가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대 남성들의 아픔을, 불안을 직시하고 노동법을 개혁하여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의 실패가 본인 잘못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모든 것을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병패를 개선해야 한다.

실현하기 어려운 요즘의 가장의 역할에 대한 상실감을 덜어주기 위해 미래 경제가 그들에게 어떤 기회를 줄 것임을 강조해 한다.
그 기회란 아버지 세대가 누리지 못했던 기회이다. 그리고 보람된 일을 찾을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 세대의 압박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상을 제시하여 현재의 부당함과 상실감을 상쇄해 줘야 합니다. 

조앤 윌리엄스는 여성들의 여건 개선도 중요하지만 남성들의 여건 개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리하면 안정된 정규직의 일자리 창출과 가족을 부양할 능력을 상실한 청년들의 상처를 위로해줘야 한다. 
다음 정권은 남,녀 구분 없이 20대 청년들의 시대적 아픔을 돌아보아야 한다. 중,장년들은 그들이 살아온 세상과 다른 이들 청년들의 삶에 대한 이해의 시각으로 이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인정해주고 상실감을 공감하며 대신 새로운 비젼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나라는 새로운 변곡점에 와있다.
나는 우리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대나무의 마디같은 지금이 되길 빌 뿐이다.
 
https://home.ebs.co.kr/greatminds/vodReplay/vodReplayView?courseId=40023168&stepId=60023845&lectId=60539521#none